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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농부이자, 엄마이자, 아이들이다!”
 
우애와 연민의 공동체, 충남 녹색당

[충남녹색당 창당 선언문]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김수영, 「거대한 뿌리」 가운데
 
 우리 모두는 땅을 살리는 농부이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며, 꿈을 품고 빛나는 아이들이다. 또한 우리는 지혜로운 노인이자,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아빠이며, 당돌하지만 씩씩한 청년들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흙에서 비롯했다는 태생적 공통점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물이며 산이며 논밭이며 나무이기도 하다.
 이런 우리들이 두어 달 전 처음으로 만났다. 하나의 촛불이 켜지자, 하나둘 공명하더니 어느새 100여 개의 녹색 촛불로 커져나갔다. 정치라고는 TV나 신문, 인터넷으로만 봐왔던 우리가, 누구 하나, 정치를 하려는 생각도 품지 못했던 우리가, 흙이자 물이자 산을 닮고만 싶었던 우리가, ‘녹색당’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지난 달 100여 개의 녹색 촛불이 모여 발기인대회를 할 때, 그때만 해도 우리는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힘들더라도 웃음과 해학을 잃지 말자고, 그래서 만나가면서 우정과 환대를 나누자고, 그리고 서로의 힘을 믿고 천천히 걸어가자고. 하지만, 순식간에 번져나갈 것만 같던 촛불은 더 이상 퍼져가지 않았고, 켜져 있던 촛불마저 하나둘 사그라지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웃음보다는 짜증을, 해학보다는 비방을, 우정은커녕 반목을, 환대는커녕 증오를 키우기까지 했다. 이제 우리는 안다. 이 모든 게 우리였음을, 이 모든 게 우리라는 걸. 그랬다, 땅을 살리는 농부이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우리들이, 또한 땅을 파내는 불도저이기도 하다는 것을, 또한 아이를 죽이는 핵발전소의 동력이기도 하다는 것을. 하여 여전히 우리는 농부이자 엄마이자 아이들이기보다는 불도저요 핵발전소의 부품들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아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충남 녹색당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시작하려 한다. 천안도 아니요 홍성 읍내도 아닌 이 시골 마을 홍동에서, ‘충남’ 녹색당을 시작한다는 건, 보잘것없고 꾀죄죄하고 찌질하기까지 한 우리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주는 징표다. 그런데 망각되고 뿌리뽑힌 이 땅 농민의 삶이, 아이들 키우느라 대접받지 못하는 엄마들의 모습이, 딱 이렇다. 시인 김수영은 이런 잊혀진 존재들이야말로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거대한 뿌리”라 말한다. 김수영의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은 지금 농부이자 엄마들이자 버려진 아이들이요 파헤쳐진 강이자 오염된 논밭이다. 우리, 무식하고 못나고 어리석은 1,000여 개의 촛불들이 이 자리에 모여 보잘것없는 목소리라도 외치는 까닭은,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혹여나 하는 간절함으로 서로를 울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 내몰린 건, 무엇보다 공감의 능력, 연민의 심성을 잃어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운동은 후쿠시마 농민의 절절함에 공명(共鳴)할 수 있는 한둘의 촛불이 있었기에 시작될 수 있었고, 그런 공감과 연민의 촛불들이 하나둘 켜져갈 때 더 큰 연민과 공감의 파문으로 확산될 터이다. 저 옛날 세상을 구하려고 했던 현자들이 한결같이 외쳤던 것, 그게 바로 공감이자 연민이었다는 사실은, 이 작은 곳에서 시작하려는 충남 녹색의 촛불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예수가 베푼 기적도 연민에서 비롯되었으며, 붓다가 베푼 기적 역시 지극한 연민이었음을, 다시금 기억하기로 하자. 그래서 우리 충남 녹색당은 연민의 정당이자 공감의 정당이고자 한다. 이런 연민과 공감의 확산이야말로 이곳에서 시작하는 우리의 작은 기적을, 더 큰 우리 모두의 기적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미국의 농부 시인 웬델 베리는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 지금 이곳은 기적의 장(場)이다. 충남 녹색당이 창당되리라 몇 명이나 믿고 있었던가. 우리 삶이 기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기적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이 기적은 우리 모두의 헌신과 열정,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모두를 ‘희생’이라는 아름답고 시적인 단어로 표현했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을 우정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우정이 자기 절제와 희생을 전제한다는 점을 잊지만 않는다면.  
 미래를 위해 현재의 욕망을 희생할 수 있기를, 그러나 그 희생이 함께 걸어가는 우정을 통해 꽃피워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나날의 우리 삶이 기적이 될 수 있기를, 이런 우리의 꿈이 먼 훗날 현실이 될 수 있기를,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촛불을 들겠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걸어가기로 하자.
 
2012년 2월 26일
충남 녹색당 당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