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핵발전소를 멈추지 않는다면
여기서 누리는 사랑스런 일상들을 먼저 멈춰야할지도 모릅니다

[충남녹색당 창당 선언문_엄마의 목소리]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난 지 1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방사능에 피폭되어 많은 사람이 죽고, 죽어가고 있으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고는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고 언제 수습될지 아무도 전망하지 못합니다.
 전 세계에 원전이 447개, 큰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10년에 한 번 꼴, 확률로 볼 때 다음번 사고가 발생할 나라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원전이 많은 우리나라, 이미 수명이 다했지만 연장운행하고 있는 고리원전 1호기, 고리원전 1호기에서 작년에 발생한 사고가 여섯 번, 게다가 최근에는 고리원전에서 중고부품을 새 것으로 조작해 납품한 비리가 적발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를 도약의 기회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지난해 12월 신규원전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방사능물질이 소멸하려면 10만년이 지나야 한다고 하던가요? 그런데 10만년 동안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가 지구상엔 없다고 하던가요? 독일이 10만년 동안 저장할 수 있도록 계획하여 폐기물을 보관하던 암염갱에 40년도 못되어 물이 새어들어가 수습할 어떤 방법도 못찾고 있다고 하던가요? 스웨덴이 중·저준위 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해 450미터 동굴을 파고 시설을 짓는데 우리돈으로 4조 4천억원이 든다고 하던가요? 핀란드가 지금 지하 500미터 암반 속에 핵처리시설을 대도시 규모로 건설중인데, 고준위 폐기물 처리 시설로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하던가요?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후, 시멘트로 씌운 건물에 25년이 지난 지금 금이 가고 방사능이 새어나와 돔 형식으로 관을 씌우는데 돈이 모자라 모금을 하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관을 씌운다 해도 100년 후면 다시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던가요?
 확률적으로 볼 때 다음 순서라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핵사고가 일어난다면? 나는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기로 합니다. 생각만으로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으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화나고, 우울하고, 까탈스러워지고, 멍해집니다. 그리고 일상이 시들해집니다. 남편이 축구경기 시청하는 것이 마땅찮아 보이고, 마을의 상조회 때 식사봉사 하는 일도 하찮아 보이고, 쓸고 닦고 살림하는 일도 귀찮아집니다. 겨울이 되면 따뜻한 아랫목에 뒹굴면서 농사계획 짜는 것이 더없는 행복이었는데 그것도 시들해지고, 앞으로 방사능 비 바람 맞아가며 농사짓는 일도 재미없게 생각됩니다.
 눈과 귀를 막고 오늘만 생각하면 좀 생기가 돌긴 합니다. 게다가 반짝거리는 아이들을 볼 때면 힘도 조금 솟습니다.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갈 아이의 가방을 고를 때, 한달 째 사라지지 않고 있는 아이의 발가락에 생긴 가려움증을 들여다 볼 때 나는 눈을 반짝입니다. 내 몸이 움직입니다.
 그렇게 움직여서 갔습니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인 마을회관으로 갔습니다. 화투를 돌리고 있는 할아버지들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할 말 있으면 놀이를 잠시 쉴 테니 말을 하라 합니다. 핵발전소가 위험해요. 할아버지들은 별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21기가 있는데 또 세운대요. 대통령이 좀 잘 알아서 할라구. 저… 손자 손녀 있지요? 결국 손자 손녀 덕분에 할아버지들이 서명을 해 주셨습니다. 손자 손녀들에게 큰 선물해주신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선물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우리 세대가 이미 저질러놓은 핵발전소만으로도 미래의 아이들은 삶에 위협을 느끼고 엄청난 세금으로 몸살을 앓을 텐데, 겨우 이것으로 선물이라니요. 정말이지 당치도 않습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때 바람이 북쪽으로 불어서 피해가 심했던 옆나라 벨라루스는 서울 면적의 10배에 달하는 6,000제곱킬로미터가 통제구역이며 방사성 오염으로 강제 이주된 14만명은 물론이고 자발적 이주를 한 20만명이 삶의 터전을 떠나 살고 있다 합니다. 더구나 아직도 100만명의 사람들이 방사능 오염이 된 사실을 알면서도 대피할 방법이 없어 그냥 그 지역에 살고 있는데 벨라루스의 아이들 중 건강하다고 분류될 수 있는 아이들은 20%도 안된다고 합니다. 그 아이의 엄마들은 저처럼 아이의 책가방 사는 일로 눈을 반짝거리고, 그까짓 발가락의 가려움증을 들여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면 씁쓸해집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려면 환경 좋은 곳을 골라 이사를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깨끗한 것을 골라 입에 넣어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사 갈 아무데도, 골라 먹일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농사지어도 괜찮은 땅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아이들이 들어가도 좋은 숲과 만져도 되는 나무들이 아직 곁에 있을 때, 실컷 들여마셔도 될 공기가 많이 남아 있을 때, 이 때가 엄마인 제가 무언가 조금이라도 할 일이 남아 있는 때인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 이미 지어진 21개의 원전을 어쩌지도 못하고, 10만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보관해야 한다는 방사능폐기물도 어쩌지 못하고, 그 폐기물을 처리할 비용이나 방법을 모색하는 일도 어쩌지 못하고, 지금 공기중에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공격하는 방사능을 어쩌지도 못합니다. 겨우 노후한 원전을 멈추는 일과 새로운 원전을 짓지 못하게 하고 대안에너지를 찾는 일에 목소리를 모으는 것 정도겠지요.
 그러나, 그래도, 일단은 먼저 원전을 멈춰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여기서 누리는 사랑스런 일상들을 먼저 멈춰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12년 2월 26일
충남 녹색당 당원 정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