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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로와 텃밭 _웬델베리

여름울 2012. 1. 10. 21:40
원자로와 텃밭

웬델 베리(Wendell Berry, 1934-) 미국 켄터키주 고향에서 유기농업을 실천하고 있는 농민. 저명한 시인이며 에세이스트, 소설가이기도 하다. <녹색평론> 1992년 11-12월호(통권제7호)에 실린 글을 다시 옮긴다.


1979년 6월 3일, 나는 인디아나주의 메디슨 부근에 있는 마아블 힐에서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에 반대하는 비폭력적 시민불복종 행동에 참가하였다. 그날 정오 경, 우리들 89명은 철조망을 넘어 전기회사의 땅으로 들어감으로써 당연히 불법침입죄로 체포되었다.

범죄치고는 거의 권태롭다고 할 정도로 우리들의 죄는 유순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떠한 폭력도 쓰지 않고, 어떠한 재산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원칙 밑에서 행동하였다. 제퍼슨 군(郡)보안관은 우리의 계획을 사전에 정확히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불법침입은 평화롭고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부드럽게 행동하는 보안관과 그의 부관들에 의하여 정중한 태도로 체포되었다. 거의 사건이랄 것도 없는 이 사건의 종결도 역시 부드럽게 마무리되었다. 검사는 체포된 89명 중 단 한 사람만 기소하였고, 그 한 사람도 법정에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부드러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마음 가벼운 사건은 아니었다. 우리들 가운데 범법행위를 쉽게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나에게는 또 다른 까닭도 있고 해서 그 결정은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어떤 종류이건 군중행동이나 시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종류의 ‘운동’이건 거기에 항상 풍선껌처럼 달라붙는 구호나 상투어들을 싫어하고,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어째서 그러한 행동을 하였는가?

몇 해 동안 나는 많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오하이오강 계곡에 발전소가 불어나는 것에 대하여 커다란 우려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지역에는 60개 이상의 발전소가 가동되고 있거나 건설 중이거나 계획되고 있다. 석탄을 사용하는 이 지역 발전소로 인한 공기오염은 이미 미국에서 최악의 상태라고 얘기되고 있다. 그리고 전기소비의 제한 혹은 조절가능성에 대한 아무런 뚜렷한 고려없이 새로운 발전소들이 건설되거나 계획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무제한한 경제성장’이라는 환상을 보증하기 위하여 그들의 건강을 희생하도록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주민들 자신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정부기관과 협력하여 전기회사들이 주민들을 ‘위하여’ 내리는 결정이다.

석탄을 사용하는 발전소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은 나쁘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어떤 전기회사들은 원자력이 ‘에너지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답이라고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원자력발전소가 지금 오하이오 계곡의 이쪽 부분에서 건설 중에 있다. 원자력발전소를 지지하는 쪽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주장은 많은 돈과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지방의 농촌전기협동조합은 원자력을 지지하는 논설을 계속하여 게재하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그러니까 전기요금을 내는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위험스럽게 생각하고 반대하는 에너지 정책을 장려하기 위하여 사실상 세금을 물고 있는 셈이다.

오하이오 계곡의 발전소들은 또하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번에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오하이오강은 주의 경계에 있다. 강의 북쪽에 위치하는 인디아나주의 발전소가 켄터키주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개의 주에 영향을 미칠 것이 필연적이면서도 발전소는 오직 한 개 주에서만 계획되고 허용된다. 그러니까 이쪽 주의 주민들은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이 없는 저쪽 주에서 내려진 결정에 종속되고 만다. 그리하여 거대기술과 기업의 행동 속에서 우리는 죠지 3세 때와 같은 착취적 식민주의를 다시금 보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처럼 나도 원자력과 그 위험의 기술적 측면들을 능숙하게 다룰 능력이 없다. 내가 갖는 우려는 어떠한 신문의 독자라도 알고 있는 몇가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1. 원자력은 지극히 위험하다. 원자력발전소의 정교한 안전장치들과 지원체계들 자체가 바로 원자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려주는 충분한 증거이다. 게다가 방사능폐기물은 엄청나게 긴 기간 동안 위험상태로 남아있게 되고, 그 폐기물들을 처리할 수 있는 예견가능한 안전한 방법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2. 위험한 사고가 원자력발전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관리들과 전문가들은 사고가 예견될 수 있고 방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고라는 것은 본래 기습적인 것이다. 예견되는 것이라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3. 원자력 전문가들과 발전소에 고용된 사람들이 이러한 사고들을 항상 능숙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원자력이 안전하게 이용되려면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의 사람들도 다른 어떤 곳의 사람들과 꼭 마찬가지로 실수할 수 있고, 공포에 질릴 수 있으며, 오산할 수도 있다.

4. 관리들이 언제나 책임있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그들은 공중의 건강이나 안전에 필수적인 정보를 고의적으로 위조, 왜곡, 혹은 은폐한다.


이러한 것들 어느 부분에 대해서건 나에게 조금이라도 긴가민가하는 의념(疑念)이 있었다면, 그런 것은 스리마일섬에서 일어난 사고에 의해서 영원히 불식되었다. 그리고 어떻든 정부가 공공안전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후견자일 수 있으리라는 가냘픈 믿음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런 믿음은 1950년대의 원자탄실험에 관한 최근의 청문회에 의하여 완전히 없어졌다. 실제로 핵실험의 위험이 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부는 폭발지역 부근 주민들에게 아무런 방사능 위험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는 것이 청문회를 통하여 드러난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마아블 힐의 철조망을 타고 올라갔을 때, 나는 “아니오”라는 투표를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믿을 수가 없다”라는 의사표현을 하고 있었다. 마아블 힐은 우리 집에서 바람을 안고 올라가서 약 20마일밖에 안되는 곳이다.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이웃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나는 원자력발전소와 그렇게 가까이 사는 위험에 비한다면 감옥에 가는 것은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6월 3일의 항의행동에 내가 온 마음으로 참여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러한 공공행동이 효과가 있다거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행동은 필요한 것이되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한 가지 문제에 집중을 하면 지나친 단순화를 가져오기 쉽다. 원자력문제가-혹은 에너지문제나 오염문제가- 해결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에 쉽사리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원자력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다른 문제들도 다 잘된다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각각의 모든 문제들은 보다 근본적인 인간문제-한번도 만족스럽게 해결된 적이 없고, 또 20세기의 어지러운 기술문제들이 지금 해결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평생의 숙제와 근심꺼리로 남아 있을-의 여러 국면일 뿐이다.

좀더 큰 위험은 도덕적인 단순화, 혹은 독선적인 태도이다. 항의와 시위, 그리고 그밖의 다른 ‘운동’은 사람들을 ‘우리’와 ‘그들’이라는 오래된 범주로 갈라놓는 경향이 있다. 힘든 일과 저항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만큼만 사물을 제대로 보고, 민감하고, 덕성스러우며, 용기가 있기만 하다면 우리의 문제들이 곧 해결될 거라고 가정하기가 쉽다. 이러한 태도도 명백히 그릇된 것이다. 원자력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대부분의 공적 논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그들’ 사이의 구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사태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서 우리가 거의 언제나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이다. 이것을 우리가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찾는 어떠한 해결도 우리는 발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마아블 힐에서 있었던 6월 3일의 그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곳까지 자동차를 타고 왔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나도 그랬다. 나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 거기에 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에너지문제의 한 국면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시위 그 자체가 에너지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위 참가자들은 시위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별 생각없이 전기 스위치들을 만졌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구에 불을 밝히기 위한 발전소 운영 때문에 강물의 흐름이 차단되고, 노천탄광으로 망가지는 자연에 대하여 크게 마음쓰지 않는다.

우리들 거의 모두는 우리가 치유해야 할 질병의 발생을 돕거나 조장하고 있다. 우리들 거의 모두는 에너지는 값싼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쓰는 에너지는 얼마라도 상관없다는 가정을 갖고 있거나, 그렇게 가정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나는 내가 자동차문제나 낭비적인 현대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엄청나게 어려운 것이고,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은 이 문제들의 긴박성과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나는 이런 문제들이 단순히 공적 항의나 저항에 의해 해결될 수는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문제들의 뿌리는 사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인데, 해결의 뿌리도 사적이거나 개인적이어야 할 것이다. 공적 항의는 불완전한 행동이다. 그것은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해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항의가 불완전한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지지하는’ 항의를 할 수는 없다. 항의로 인하여 기대될 수 있는 긍정적인 것은 ‘의식화’이다. 그러나 의식화는 오직 항의를 하기 위한 수준까지의 의식화이다.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도, 우리의 의식을 어느 수준까지 ‘들어올리고’, 그렇게 하여 언제까지나 항의를 계속하는 것은 가능한 일로 보인다.

꼭 부정적으로 해야 한다면, 좀더 나은 일들이 있다. 우리는 파괴적인 것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을 그만둘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제 더 이상 스스로 즐기는 일에 전기나 석유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서약은 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내 생각에 이상적인 부정적 행동의 하나는 텔레비전 수상기를 없애는 일이다. (그걸 팔아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써 텔레비전을 치운다는 것은 속임수이다. 그걸 치우려면 무겁고 무딘 연장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해체시켜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실제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바람직스럽지 못한 어떤 것을 없애버릴 때, 우리는 바람직스러운 어떤 것을 초대하고 있는 셈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어떤 틈을 마련할 때마다 그 틈은 곧 무엇인가로 채워질 것이다. 석유를 동력원으로 하거나 혹은 전자 장비에 의해 제공되는 오락을 폐기할 때 우리는 일찍이 ‘가정생활’이라고 알려졌던 담소와 작업과 유희의 구조를 다시금 부활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산책이라든가 독서와 같은 점잖고 유익한 즐거움을 새로이 갖게 되는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일터까지 걸어서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예 자동차 없이 지내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어떤 종류의 모터로 움직이는 연장을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화석연료를 이용한 난방방법에서 태양열 집열기나 목재를 쓰는 난로로 전환하는 것이 경제적이거나 즐거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지 않는 어떤 종류의 부정적 행동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포기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이것은 즉각적으로 해결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부정적 행동은 긍정적인 행동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떤 행동은 다른 것들보다 더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행동이 더욱 완전하면 할수록 하나의 항의로서도 그것은 더욱 효과적인 것이 된다.

그러면 무엇이 완전한 행동인가? 그것은 사람이 자기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고, 자기자신이 전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그러한 행동은 많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내생산 작업은 분명히 그런 행동에 속한다. 가내생산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가능한 것은 텃밭가꾸기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텃밭가꾸기를 저항이나 항의의 행동으로 보는 것은 텃밭일을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나는 거기에 동의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텃밭일은-혹은 가장 좋은 텃밭가꾸기는- 하나의 완전한 행동이다. 그것은 하나의 항의 이상이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인 항의가 된다.

가장 좋은 텃밭가꾸기는 외부 원천으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가내생산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기적’ 원예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원예가 제공하는 가장 즐거운 면의 하나는 그 독립성이다. 토양 비옥도나 식물보호를 위하여 그것은 가능한 한 자체의 자원에 의존한다. 종자나 묘종을 자급함으로써 독립성이 더 커진다. 석유제품이나 가솔린엔진 사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텃밭을 가꾸면 독립성도 증진되면서 동시에 에너지문제에 대한 진정한(즉, 항구적인) 해결이 마련되기도 한다.

텃밭은 사람의 삶터를 흥미로운 곳으로 만든다. 그것은 재미있는 오락을 즐기고, ‘삶을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먼 곳에 의존해야 한다는, 그리하여 텔레비전을 보거나 여행을 해야 한다는 느낌-이것이야말로 수많은 ‘환경’문제의 원인인데-을 없애버린다.

텃밭가꾸기로 인하여 이용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토착자원의 하나는 뜰을 가꾸는 사람 자신의 육체이다. 국민경제가 우리의 흔한 육체적 에너지와 기능을 대신하는 대체물을 사고 파는 것에 주로 기초해 있는 시기에, 텃밭일은 사람의 몸을 쓸모있는 것으로 회복시켜 준다. 아마도 가장 특징적인 현대적 ‘업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육체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일 것이다. 조깅이나 기타 다른 행태의 인위적 운동은 육체의 쓸모를 되돌려놓지 못한다. 그러한 것은 다만 육체의 쓸모없음에 동의하는 방식일 뿐이다. 텃밭일은 인간육체에 존엄성을 되돌려준다.

육체의 쓸모없음을 초래해온 공통된 가정의 하나는 육체적인 일이 비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육체가 노예나 기계로서 사용된다면, 즉 그것이 오용된다면, 그 가정은 옳다. 그러나 텃밭일은 육체를 오용하지 않고, 또 마음을 우둔하게 만들거나 ‘야만스럽게’ 만들지도 않는다. 텃밭일은 지겨운 노역이 아니라 인간지성에 대한 가장 섬세한 종류의 도전을 제공한다. 텃밭일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배워야 하는 학습이 아니고, 그때그때 부딪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들을 계속하여 제출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농업 및 생태적 교육이며, 이 교육은 값싼 에너지에 길들여져 있는 정신을 교정한다.

텃밭일은 건강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고, 건강문제를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적 책임으로 만든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도, 텃밭일은 정치적인, 그리고 심지어 민주적인 힘을 가진다. 우리가 투표나 시위는 오직 이따금 할 수 있을 뿐이지만 텃밭가꾸기의 정치적 힘은 끊임없이 행사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텃밭일은 뒤뜰을(혹은 앞마당이나 공터를) 생산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세계의 풍요로움에 크게 이바지한다. 그리고 절제되고 책임있게 이용된다면 이 풍요로움은 무한한 것이다. 뜰을 가꾸면서 우리는 이 시대의 가장 긴박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 그것은 어느 정도가 충분한가라는 문제이다. 우리의 목표는 ‘이제 충분하니까 그만’이기 때문에 우리는 화학약품을 가지고 우리의 텃밭을 짓이겨놓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 절제되고 겸허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원자로나 그밖의 거대한 기술공학적 해결책은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빈곤하고, 물화(物貨)가 희소하다는 압도적인 암시를 전달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거대기술을 움직이는 원리가 과소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풍요로움과 방종한 낭비 사이의 결정적인 구분이 없다. ‘무제한의 경제성장’이라는 이상은 언제나 더욱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충분하게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겁에 질린 불안에 의해서 성장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만하면 충분한’ 상태는 항구적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음’은, 그 모든 ‘경제성장’의 과대선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일 뿐이다. 그리고 거대기술에 의한 해결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은 30년이다! 텃밭은 올바른 방법과 주의가 기울여지면, 세계가 지속되는 동안 계속될 것이다.

물론 텃밭일이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텃밭일에서 우리는 땀을 흘리게 되고, 얼마 동안은 등을 구부린 채 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 아픔과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함으로써 우리는 발전소와 발전소가 대변하는 것들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가 얻은 많은 안락과 편의는 전기, 가스, 수도와 같은 다양한 공공사업체들과 정부기관에 대한 우리의 의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의존적으로 되면 우리의 독립성과 자유가 상실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달리 말하여, 우리는 중앙집중화된 권력의 변덕과 오용에 종속되지 않고, 또 우리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지 않고, 불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려면 우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텃밭이 어떻게 원자로와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인지 누군가가 틀림없이 물을 것이다. 물론 정확히 경쟁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항의와 시위는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독가스를 호흡하거나 암으로 죽거나 하는 것밖에 아무런 선택이 없을 때 감옥은 가장 자유로운 장소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자신 속에 있는 잘못의 원천을 바로잡지 않고 공공의 잘못을 교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와 동시에, 아는 텃밭일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원자로는 ‘에너지문제’에 대해 제시된 하나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거대기술에 의한 해결방식이 모두 그렇듯이 이것도 한가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많은 다른 문제들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방사능폐기물과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 채택된 해결책이 때가 되면, 관리들과 전문가들에게 ‘기습적인 사고’로 나타날 또다른 심각한 문제들을 유발시킬 거라는 것은 우리가 확신을 갖고 예언할 수 있다. 거대기술은 언제나 그러한 방식으로 저 자신에게 항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제한한 경제성장’의 한계이다.

그러나 텃밭일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로 나아가는 한가지 해결책이다. 그것은 건강과 양식(良識)에 기초하고, 또 건강과 양식을 보증하는 무한한 패턴의 일부이다.


그림출처: http://www.betterworldheroes.com/berry-wendell.htm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Wendell_Berry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웬델_베리